아직은 쓸 만해요/박일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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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쓸 만해요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박일천
밤 10시가 넘어 잠잘 준비를 하며 책을 읽고 있는데 따르릉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밤중에 무슨 전화일까, 궁금한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친구 남편이었다. 이따금 부부끼리도 만나는 터라 잘 아는 사이지만 이 시간에 웬일일까? 다소 긴장한 목소리가 전화기너머로 들려왔다
“집사람 혹시 만났나요? 연락도 없이 이 시간까지 안 들어 와서요?”
“아, 그래요. 곧 들어오겠지요.”
그러자 다소 가라앉은 소리로
“이렇게 늦게 오는 사람이 아닌데요. 전화도 안 받아요. 세상에는 이상한 일도 많아서요.”
평소 쾌활한 사람이 심각하게 말하니 웃음으로 걱정을 덜어 주고 싶었다.
“걱정 마세요. 누가 납치했을까봐 그래요? 우리 나이는 돈과 사람을 묶어 놓으면 돈만 갖고 간다고 하니 염려마세요.”
다른 때 같으면 껄껄 웃어넘겼을 성격이나 걱정이 되는지 진지한 목소리로
“아직은 쓸 만해요, 그 사람. 다른데 연락해보고 어쨌든 다시 전화할게요.”
내 깜냥에 위로라고 한 말이지만 마음이 불안한 사람한테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한 듯했다. 아무 일 없으려니 하면서도 전화기 쪽으로 자꾸 눈이 갔다. ‘아직은 쓸 만해요’란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50대 끝자락 나이면, 아이들 교육도 다 끝나고 일부는 출가까지 시켰으니 살아온 날보다 살날이 적은 때로서, 정상에서 내려가는 세대다. 직장생활을 할지라도 젊은 날 동분서주하며 신바람 나게 일하던 활력은 전설 속으로 사라지고. 젊은 신세대에 밀려 뒷전을 맴돌며 자리보전하기에 연연할 나이다. 부부지간에도 그저 스스럼없이 편한 친구 같은 사이가 아닐까? 사랑스런 눈길로 바라보는 애틋함은 먼 옛날 추억 속의 그림일지도 모른다. 신체적으로도 성인병에 노출되어 건강도 챙겨야 하는 나이다. 그런데도 친구의 남편은 ‘아직은 쓸 만해요.’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걸보니, 내 친구는 꼭 있어야할 소중한 아내인 것 같아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흘렀다. 11시가 넘어 전화벨소리가 다시 울렸다. 기다리던 참이라 재빨리 수화기를 들었다.
“집사람이 들어왔어요. 모임에서 이야기하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하네요. 전화기는 전원이 나갔고요. 나이가 들면 여자는 간이 커지고 남자는 쪼그라드나 봐요. 집사람은 태연하고, 나만 애태웠어요. 하하”
평소처럼 호탕하게 웃는 친구남편의 목소리에 행복감이 묻어났다. 모처럼 현모양처인 친구가 밤 11시가 넘어 귀가했다고 전주시가 발칵 뒤집힐 정도로 이집 저집 전화통에 불이 난 '김 여사 실종사건'은 이렇게 해피엔딩 해프닝으로 끝났다. 누구나 곁에 있는 사람은 공기처럼 소중한 줄을 모른다. 잠깐이나마 행방이 묘연하여 애태우다 보니 아내가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가 새삼 느꼈으리라.
나도 아직은 쓸 만한가? 문득 어느 여름날 시누이 내외가 다니러 왔던 일이 떠올랐다. 밤이 되어도 날씨가 더워서 모두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시누는 나와 나이도 비슷하고 명랑하여 만나면 대화가 잘 통한다. 그날도 밀린 이야기로 웃음을 나누며 함께 돌아오던 중, 시누가 불현듯 공원에 잠바를 놓고 왔다고 하였다. 되짚어가서 옷을 가지고 한참 후에 돌아오니 두 남자의 반응이 묘하게 엇갈렸다. 시누남편은 왜 이렇게 늦게 오느냐고 따지듯 물었고, 우리 남편은 집 앞 골목길에서 서성거리다 깜짝 반기며,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어? 누가 납치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다고. 황금오리가 없어져서 한참을 찾았네. 하하”
여기서 황금오리란 살림도 잘하고 자녀교육도 잘 시키며 돈도 잘 버는 아내를 오리에 비유한 유머다. 두 사람의 반응이 정반대라 시누와 나는 마주보며 한참을 웃었다. 시누가 짐짓 시샘하는 목소리로,
“언니가 황금오리니까 없어질세라 오빠가 안절부절 못하고 기다렸구먼. 집오리는 대우도 못 받고 서러워서 살 수가 있나?”
하고 농담을 하여 모두 집안이 떠나가도록 웃었다. 아무튼 내가 아직은 쓸 만하다는 속마음을 보인 남편의 유머였다. 평소 부부간에도 긍정적으로 살다보면 사소한 일은 감싸주고 유머로 넘기며 웃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얼마 후 동창회에서 ‘김 여사 실종사건’을 이야기 해 주었다. 내가 친구 남편이 해준 말을 그대로 흉내 내며 ‘아직은 쓸 만해요. 그 사람.’이라는 말에 친구들은 ‘아직도 청춘인가보네’ 한마디씩 하며 모두들 자글자글 웃었다. 당사자인 김 여사는
“자기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새벽에 들어 올 때도 있으면서 하루 늦게 들어왔다고 동네방네 시끄럽게 야단이야. 야단.”
힐난 섞인 말을 하면서도 기다리며 애태운 남편의 행동이 싫지는 않은지 덩달아 웃었다.
“맞아. 김 여사가 아직은 미모가 출중하여 서방님이 불안한가 보더라.”
하고 내가 거들었더니 친구들은 "맞다, 맞아!" 박수까지 치며 모두들 포복 졸도하였다. 잠깐의 친구 실종사건으로 빚어진 에피소드로 우리들은 한바탕 웃음바다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나이가 들수록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주변에서 쓸 만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괜찮은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 말 속에는 사회와 가정에서 꼭 필요하며 인격적으로 덕을 갖춘 사람이라는 뜻이 숨어있다.
나무는 세월이 갈수록 나이테가 불어나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거목이 된다. 그렇듯이 사람도 나이가 들수록 지혜와 사랑의 나이테를 점점 크게 둘러싸야 할 것이다. 지나간 세월만큼 나이테에 자신의 흔적을 아름답고 쓸모 있게 새겨야 하리라. 그리하여 주고 또 주어도 마르지 않는 옹달샘 샘물처럼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20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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