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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밖 네거리/강우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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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두루미
댓글 0건 조회 724회 작성일 11-09-16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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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 밖 네거리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강우택 여러해 전까지만 해도 사람으로 붐볐던 곳이다. 그곳에 큰 건물의 공무원연금매장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유난히 짙은 초록색 잎사귀가 무성한 오동나무 한 그루 밑에 일제 강점기 때 지은 낡은 일본식 목조건물 한 채가 길가에 서 있었다. 나는 그 오동나무와 낡은 집이 있는 거리를 걷기 좋아하였다. 그 거리를 걷고 있으면 마치 어머니의 포근한 품에 안긴 것 같아서 좋았다. 철이 들 때까지만 해도, 이 거리는 무섭고 신기한 거리였다. 아마도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거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처음으로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당시 북문 밖 네거리는 가끔 산더미 같이 쌓아 놓은 곡식 가마를 사람들이 등에 메고 날라서 쌓아 두는 큰 창고 서너 개가 있었다. 부엌일을 하는 아주머니가 젖먹이 동생을 등에 업고 창고에 들어갔다가 갇혀 버렸으나 창고 밑 공기구멍을 통해 새어 나오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사람이 갇힌 사실을 알고 구출했던 어이없는 사건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동네가 바로 북문 밖 네거리였다. 지난날 사람들은 옛 성문을 중심으로 지명 이름을 곧잘 불렀다. 동문 밖 새악시 집, 서문 안 교회, 남문 밖 싸전 등이 그것이다. 지금은 이런 지명을 쓰지도 않거니와 들을 수도 없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이름을 들을 때면 오히려 친근감과 향수를 느낀다. 당시 나에게 북문 밖 네거리 길에서는 가끔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졌던 거리이기도 하였다. 어느 날 밤에는 대바구니 같이 큰 일본 등을 든 사람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는가 하면, 또 어느 날에는 총과 배낭을 멘 큰 학생들이 나팔소리에 맞추어 걸어갔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무서워서 집에 꼭 꼭 숨어 옴짝달싹도 못했었다. 그것은 내가 퍽 어렸을 때 일로 생각난다. 나는 그 거리를 걸을 때 그 낡은 집을 한 번도 기웃거려 본 적이 없다. 나에게는 지금도 노랗게 빛이 바랜 그 무렵의 사진 한 장이 있다. 작은 단풍나무사이로 잘 가꾸어진 정원에서 이종사촌누이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다. 무엇인가 뾰로통한 얼굴로 찍은 사진이다. 가끔 이 사진을 꺼내보면서 나도 이렇게 어릴 때가 있었는가 하고 웃는 그런 사진이다. 아마도 옛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서 그리 하였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일본의 역사소설가 한도 가즈토시가 쓴 《쇼화사》라는 책 상하권을 읽으면서 그 이상한 거리에 대한 궁금증을 어렴풋이나마 풀 수 있었다. 1940년 전후 일본군국주의는 지나사변을 일으키고 중일전쟁에 돌입하여 “국가총동원”이라는 동원령을 내려 식민지하의 우리 국민들을 들볶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이미 세계 제2차 대전이 시작되어 단말마의 일제가 전쟁으로 들뜬 무렵이 아니던가 싶다. 나의 유년 시절의 북문 밖 네거리는 늘 요란하고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이상한 거리였음에 틀림이 없었다. 나와 같이 도시에서 낳아 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은 복사꽃과 살구꽃이 피며 실개천이 흐르는 정겨운 고향은 없다. 다만 옛날 살던 집과 동네가 있을 따름이다. 까마귀는 둥지의 알에서 깨어 날기만 하면 다른 곳에서 살다가도 늙은 어미가 있는 옛 둥지로 돌아온다고 한다. 이러한 귀소본능은 사람에게도 있다. 명절 때의 민족적 대이동이라든가, 북의 실향민들이 그토록 오래 고향을 그리워하는 심경이 이를 대변하여 준다.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본 한 장면이 머리에 떠오른다. 열 살 전후의 한 소녀가 그 소녀의 아버지 손에 이끌려 시설에 맡겨지고 그 아버지는 떠나버린다. 그 소녀는 언젠가 자기의 아버지가 다시 자기를 찾으러 온다는 별로 실현가능성도 없는 그러한 희망을 굳게 믿고 차츰 그 또래의 아이들과 적응해 가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훔친 적이 있었다. 최근 어느 한 인구센서스의 분석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3,40대 부부의 이혼율이 10년 전에 비해 배로 늘었다고 한다. 주된 원인으로는 남성들의 가부장적인 사고방식과 여성들의 주체성강화에 따른 부부간의 충돌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이럴 바에는 차라리 혼자 산다는 식이다. 이러한 파경 뒤에는 아이들의 양육문제가 뒤따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손쉬운 방법으로 아이들을 시설에 맡겨버리거나 늙은 부모에게 양육을 위탁한다. 조손가정(祖孫家庭)이 느는 것도 문제다. 저희가 낳은 자식을 저희가 키울 일이지 늙은 부모가 무슨 죄가 있어 손자들까지 떠맡아 키운단 말인가? 요즈음 젊은 사람들의 작태가 이해되지 않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린 자식들이 받는 마음의 상처는 어떤 것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이들이다. 아이들은 가장 행복해야 할 유년기와 소년소녀기의 추억을 깡그리 짓밟혀 버린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中國 고대 주희가 쓴 ‘大學論’ 장구에 나오는 '修身齊家 治國 平天下'에서도 인간의 윤리는 가정이 그 근본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溫故知新'할 진리임에 틀림이 없다. 어느 날 아내와 함께 그 넓은 매장 한 구석에 있던 구내식당에 들른 적이 있었다. 자리를 잡자마자 나도 모르게 그만 큰소리로 여기서 밥을 먹은 게 60년도 훨씬 넘었다는 말을 하였다. 식당주인 여자는 이 식당을 연지 1년도 채 안 되었다면서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곁의 아내가 이 분이 어렸을 적에 이곳에 있었던 옛집에서 살았다고 일러주었으나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맞아, 바로 내가 앉은 자리에 목욕탕이 있었어.' 어쩌면 그렇게 옛 기억이 되살아나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사람은 모두 그 나름의 요람기를 갖고 있다. 다만 어떻게 빨리 그 시기의 기억을 되살리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가끔 나는 나의 아름다운 인생의 요람기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 곧 휴가철이 되면 자식들과 며느리들 그리고 손자들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지금의 북문 밖 네거리는 차들만 빼곡히 들어앉은 주차장이 들어섰고, 사람들로 붐비는 시장입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 옛날의 북문 밖 네거리는 좀처럼 내 마음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1911.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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